백제의 찬란한 역사, 세계 속에 부활하다

입력 2015-07-27 07:00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공주·부여·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 두번째 王都 공주

왕의 금제관장식 등
108종 2906점 발견
백제문화 진수 보여줘
공주박물관서 특별전

마지막 王都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
목조건축 같은 정교함
낙화암 황포돛배 타고
운치있게 백마강 일주

무왕의 꿈이 서린 익산

해체된 미륵사지석탑
2017년 7월 모습 드러내

왕궁리 유적에선
백제 왕궁의 모습 담아



[ 김명상 기자 ]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건축기술.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예술 세계, 다른 국가에까지 전파된 문화적 우수성. 1400여년 전 찬란하게 번영했던 백제가 돌아왔다. 공주·부여·익산의 백제 유산을 묶은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재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세계의 유산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우리는 백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가치를 모른다면 보석도 돌덩이에 불과하다.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거의 700년을 존속한 백제. 이번에 유네스코 세窩?遠막?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 후기를 대표하는 유산이다.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도시계획, 건축기술, 예술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모방에만 그치지 않았다. 더욱 발전시켜 백제만의 독창적인 문화적 가치를 창출했고 이를 일본 등 주변국에 전파하며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심지가 됐다.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700년 역사의 백제를 만났다. 그 위대한 자취는 백제역사지구에서 만날 수 있다. 아직은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지만 백제의 우수한 문화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공주 무령왕릉 한국 고고학 최대의 발견

백제의 두 번째 왕도인 웅진(공주)은 백제의 678년 역사 중 64년 동안 수도였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웅진이 중요시되는 이유 중 8할은 무령왕릉 때문이다. 무령왕릉 발견은 한국 고고학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웅진시대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원래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해 7기만 복원돼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고분은 도굴을 당해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번호로만 불린다.

잠자던 무령왕릉의 존재는 1971년에야 알려졌다. 6호분 내부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수로를 정비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백제의 무덤은 도굴하기 쉬운 구조다. 무덤 입구의 돌만 치우면 바로 무덤 내부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 하지만 무령왕릉은 한 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채 발견됐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여기서 나온 유물은 왕과 왕비의 금제관장식을 비롯해 왕릉을 수호하기 위한 석수(石獸), 중국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화폐 오수전,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 등 108종 2906점에 이른다. 이 중 12점은 국보로 지정됐다. 이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약 1400년 만에 발견된 무령왕릉은 안갯속에 가려 있던 백제 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왕릉에서 발견된 두 장의 묘지석은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武寧王·461~523)과 그의 왕비임을 분명히 알려줬다. 왕의 지석 앞면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계묘년(523년) 5월7일 62세로 돌아가셨고 을사년(525년) 8월12일에 안장됐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에도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斯麻)로 쓰여 있어 기록이 일치한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문화재청은 1997년 7월부터 영구적으로 무령왕릉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아쉽지만 실물과 같은 모형을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국보 12점 등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gongju.museum.go.kr)에 전시돼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해 ‘백제, 세계인을 맞이하다’란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올해 말까지 연다. 각종 백제 유물 100여점을 관람할 수 있다.

또 다른 세계유산인 공산성은 도읍지인 공주를 방어하기 위해 축성된 산성이다. 백제 때에는 웅진성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석성은 조선 중기에 새로 쌓은 것으로

그 밑에 백제 시대의 토성이 지난다. 동서로 기다란 형태의 산성 길이는 2.2㎞ 정도로, 서쪽으로 난 금서루를 출발해 연지와 만하루, 진남루를 거쳐 다시 금서루로 돌아오는 데 한 시간 반 정도면 충분하다. 특히 밤에는 조명이 켜지면서 화려한 백제의 역사만큼이나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진다.


부여 정림사지 수난의 역사 딛고 빛나다

사비(부여)는 백제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왕도였다. 백제 성왕은 서기 538년에 웅진(공주) 시대를 마치고 사비로 천도했다. 이후 123년간 백제의 수도로 자리한 사비도성의 중심지에는 정림사가 있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지만 내부의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예전 모습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백제의 수도 사비에서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예전에 평제탑이라고 불렸다. 석탑 1층 몸돌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고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문구를 새겼기 때문이다.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한 기념탑이라는 얘기다. 백제에 치욕적인 이 문구가 역설적이게도 탑을 온전케 했다. 모욕을 견디며 살아남은 석탑은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백제인의 돌을 다루는 기술이 정점에 달했음을 증명하는 유적이다. 돌을 그저 쌓은 것이 아니라 목조 건축물을 짓듯 부재 하나하나를 끼워 맞추는 가구식(架構式)으로 설계됐으며 지금까지 한 번도 해섧?적이 없다. 그만큼 백제인들의 석재 가공기술 및 건축기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백제유적통합관리사업단의 이해문 박사는 “탑을 해체해 보수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인데 정림사지 석탑은 천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보다 안정화하기 어려울 만큼 완벽해 해체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부여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 관북리 유적지, 나성 등 네 곳이다. 관북리 유적은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건물터, 하수도, 도로 유적 등이 발견돼 이 일대가 왕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알려졌으며 현재도 조사 중이다. 능산리 고분군에는 왕과 왕비 등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7기의 고분이 있다. 무덤 서쪽 절터인 부여 능산리에서 백제 문화의 정수로 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면서 능산리 고분이 왕실의 무덤이라는 것이 다시 확인됐다.

나성은 사비의 동쪽 부분을 방어하던 성곽시설로 도시 안팎을 구분하는 상징적 경계이기도 했다. 내부에는 왕궁을 비롯해 관아, 민가, 상가, 방위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성은 유사시 도성의 방어거점으로 사용된 곳으로 내부에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다.

삼천궁녀가 투신했다는 전설이 서린 부소산성 내 낙화암(落花岩)은 황포돛배를 타고 운치 있게 바라볼 수 있다. 정림사지에서 2㎞ 거리의 구드래나루터에서 백마강을 일주하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성인 1만2000원.


익산 미륵사지 한국 최대 석탑 복원 중

익산에서는 왕궁리 유적을 만날 수 있다. 미륵사지에서 5㎞ 정도 남쪽에 자리한 유적이다. 백제 무왕 시기에 왕궁으로 건립된 뒤 나중에 중요 건물을 헐고 사찰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제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경계와 내부구조가 확인된 유적이다. 왕이 정사를 돌보던 정전 등 14개의 백제 건물지와 정원 유적, 공방지, 대형 화장실 등이 발견됐다. 발굴 조사 중 출토된 유물은 왕궁리유적전시관(wg.iksan.go.kr)에 전시하고 있다.

익산의 백제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륵사지다. 한국 최대의 석탑인 미륵사지석탑이 이곳에 있다. 1915년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바른 뒤 안쓰럽게 버티던 석탑은 2002년 해체됐으며 2017년 7월 보수정비 작업을 마친다. 본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7층 이상의 부재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6층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창건 이후 축적된 시간도 석탑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추론에 의한 복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원래 부재 중에는 훼손된 것이 많지만 과학적 방법을 동원한 보강 작업을 통해 부재 재사용 비율을 72%까지 끌어올렸다. 올해 1층이 조립될 예정이며 이제 12개의 기둥이 세워졌다. 작업은 더디지만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낼 석탑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석탑 해체 조사 중 경사스러운 일도 있었다. 2009년 1월 1층 첫 번째 심초석을 해체하던 중 석탑 건립 당시 봉안한 사리장엄(舍利莊嚴)이 발견된 것. 사리장엄이란 탑에 봉안된 불사리를 담은 용기들을 말한다.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당시 지질자원연구원에 심초석을 조사해 달라고 의뢰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면서 텅 빈 공간이 있다고 하더라”며 “문화재 전문가가 아닌데도 처음 사리장엄을 발견한 순간 심상치 않음을 느껴 즉시 작업을 중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발견된 유물의 수량은 9600여점으로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3중의 사리기(사리를 모신 그릇)와 금제사리봉영기, 각종 장신구 및 유리구슬, 직물 등이다. 특히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3㎜, 세로 10.3㎜, 두께 1.3㎜의 얇은 금제박판으로 미륵사 창건 배경, 발원자, 석탑 건립연대 등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긴 중요 기록물이다.

백제 무왕은 602년 신라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13차례나 신라를 공격했다. 백제의 부흥을 바라던 그의 꿈은 1400여년이 지난 지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다시 꿈틀대고 있다. 백제 문화의 전모가 드러나려 하고 있다. 그 거대한 시작은 이제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안희정 충남지사 "1400년 前 백제 역사에 韓·中·日 갈등 해법 담겨"

“1400여년 전 백제의 역사를 통해 동아시아 3국이 서로 어떻게 교류하고 평화와 번영을 누렸는지 생각한다면 외교적 갈등도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안희정 충남지사(사진)는 “1400여년 전 백제의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할 때 대한민국 발전의 힘도 나올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안 지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충청남도는 중앙정부·문화재청·전라북도와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의 보존과 발굴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지역 발전의 동력이 되도록 관광산업과 도시 발전 전략을 추진하면서 공주·부여 등 해당 시·군에 대한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학문적 연구도 뒷받침돼야 한다”며 “백제사와 고대국가 역사에 관한 순수 학문적 연구에도 투자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공주·부여·익산=김명상 기자 terr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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